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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복명의 진실

김진호이메일

의문의 제기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은 역사적 중요성에 비추어 이상하게 사실을 제대로 적지 않거나 아예 적지도 않은 1591년 2월의 建儲의 사건이나 임진왜란 서계 보고에 대한 것일 것이다.

선조실록에는 임진왜란전 통신사 복명은 아예 한 줄도 적지 않고 있다. (선비 1천여명을 일망타진한 기축옥사의 발단인 정여립의 난에 대한 기록을 보면 박충간이 밀고한 이후로 눈에 보이듯이 실시간으로 보는 듯 선조의 대처상황이 기록되어 있는 것과 아주 대비된다.)

선조수정실록은 1591년 3월에 황 상사가 침략정황을 서계로 보고하고 이어서 어전에서 구두로 복명한 것처럼 왜곡하여 서술한다.(선조실록은 황 상사의 부산 도착이 1591. 1. 28이라며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진 1591. 2. 6자에 기록을 하고 있다).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은 정철이 조정의 논의를 거쳐서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건의(建儲 사건)에 대해 선조가 진노하여 거부한 사건을 그것이 일어난 1591년 2월의 기록에 한 줄도 적지 않고 있다. (建儲 사건는 당시까지 기축옥사로 집권한 정철과 서인이 실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중대한 사건이다.)

참고로 왜란에 대비한 이순신의 발탁은 선조실록(1591. 2. 12)이든 선조수정실록(1591. 2월)이든 모두 다 사실대로 적고 있다. 선조실록은 선조가 이순신의 초특급 발탁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을 힘으로 눌렀다는 사실까지 적고 있다.(왜란에 대한 정보가 그 시점 이전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통신사의 구두 복명은 분명이 3월에 일어났으므로 서계 도착이 그 시점 이전에 있어야 2월에 그러한 대비가 나올 수 있다.)

1591년 2월의 建儲의 사건을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에서 빠트리고, 임진왜란 서계 보고를 선조실록이 빠트리며, 선조수정실록은 그것이 마치 3월에 일어난 일인 양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선조실록

1592년 3월 이전의 宣祖 관련 모든 史草는 불에 타 사라졌다. 이 부분 선조실록은 私家의 서류를 모아서 편찬한 것이어서 객관성면에서 문제가 많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절 북인들이 편찬하였다. 서인과 남인에 대해 폄하한 것이 많다. 아래는 임진왜란 복명과 建儲관련 기록이다.

1591. 2. 6
통신사가 1. 28. 동래부에 도착했다. 종사관 허성과 성천지를 동래부에 수감했다.
[서계도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대한 사실을 실록은 무슨 이유인지 기재하지 않고 있다.]

1591. 2. 11.
의금부가 허성을 잡아 가두었다

1591. 2. 12.
李薦ㆍ李億祺ㆍ梁應地ㆍ李純臣을 남쪽 요해지에 定送하기를 비변사 낭청이 청하자 임금이 그리 분부하였다.

1591. 2. 16.
간원이 전라 좌수사에 초수된 李舜臣의 체차를 청했으나, 임금이 불허했다.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1591. 2월의 매우 중요한 사건인 정철의 建儲에 대한 이야기는 한 줄의 기재도 없다.]

[1591. 3월 매우 중요한 사건인 통신사 복명 내용도 일체 기록이 없다.]

1591. 10. 24
주청사 韓應寅, 서장관 辛慶晉, 질정관 吳億齡 등을 명나라에 보냈다. 聖節使 金應南이 갈 적에 왜적이 중국을 침범할 뜻을 갖고 있음을 禮部에 移咨했지만, 通信使의 왕래를 말하지 않았는데, 중국의 兵部가 우리나라에 그 사실 여부를 물어 와서 다시 주청사를 보내어 그간의 곡절을 해명하려는 것이다

1595. 2. 6.
이항복은 “신이 그때 함께 정원에 있으면서 성일에게 물어보았더니, 성일도 깊이 걱정하면서. ‘남쪽 지방 인심이 먼저 요동하니, 내가 비록 장담해서 진정시켜도 오히려 의심을 풀지 않을 것이다.’ 했습니다”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수정실록은 인조 시절 서인과 남인들이 편찬하였다. 북인에 대해 폄하한 것이 많다. 아래는 임진왜란 복명과 建儲관련 기록이다.

[1591. 1. 통신사의 도착을 기재하지 않고 있다.]

1591. 2. 1.(이 즈음의 수정실록은 그 달의 모든 일을 1일자로 기록하였다)
특지로 이성중이 충청 감사로, 이해수가 여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이 좌천의 이유인 건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李舜臣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정철을 영돈녕부사로, 이양원을 우의정으로,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이 인사의 이유인 건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1591. 3. 1.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부산으로 돌아와 정박하자 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馳啓하면서 ‘필시 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 복명하니 상이 引見하고 하문하였다. 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였다. [윤길의 치계가 1월이 아니라 마치 3월에 있었던 듯이 서술했다. 이후 재조번방지나 연려실기술은 아예 3월에 치계한 것처럼 적었다.]
유성룡이 성일에게 물으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하였다.
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모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고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세력을 잃은 이유는 건저문제였는데 일체 언급이 없다.]
宣慰使 吳億齡이 ‘내년에 길을 빌어 上國을 침범할 것이다.’고 확언하는 玄蘇 말을 듣고서 즉시 啓聞하니, 조정의 의논이 크게 놀라 즉시 아뢰어 체직시키고, 응교 심희수로 대신케 하였다. 억령은 이때에 일의 기미가 위급함을 알고서는 미움을 사는 것도 피하지 않고 모두 말하였는데, 결국 밀려나게 되었다.
옥천에 있던 조헌이 일본의 서계에 분개하여 침략에 대비할 것을 아뢰었다.

1591. 윤3. 1.
倭使 平調信ㆍ玄蘇 등이 서울에 왔다. 黃允吉ㆍ金誠一 등으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였다. 현소가 “만약 조선에서 먼저 奏聞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이다.”하니. 성일 등이 大義에 비추어 옳지 못한 일이라고 타이르자, 현소가 “옛날 고려가 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이다.”하였다.

1591. 4. 1
임금이 倭情을 중국에 주문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논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 주문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윤]두수는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중국 조정에 奏聞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하고, 이산해는, “우리가 왜국과 통신하였다는 것으로 죄책할까 염려됩니다.”하였다.

1591. 5. 1.
부제학 김수가 “平秀吉은 狂悖한 자로, 그의 말은 겁을 주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실상이 없는 말로 陳奏하기까지 하는 것이 사리상 어찌 합당하겠습니까.”하자, [황]정욱은 “지금 이러한 말을 듣고서 어찌 태연히 있으면서 주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설사 침범할 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서계가 이와 같다면 주문해야 한다. 그들이 꼭 침범할 것이라고도 하고 꼭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하는 것은 소견이 다른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전일 윤두수의 말도 이와 같은 점을 염려한 것이니, 주문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하자, 다음날 아침 李山海ㆍ柳成龍ㆍ李陽元 등이 “일본에 잡혀갔다 도망해 온 金大璣 등에게서 들었다고 말을 만들어 주문하는 것이 가장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賀節使 金應南의 행차에 대략 倭情을 갖추어 전해들은 말이라고 일컫고서 예부에 자문을 보내기로 하였다.
평의지가 또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 않고 邊將에게 다시 이야기하여 변장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었으나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평의지가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후로 해마다 조공오던 왜선이 다시 오지 않고, 館에 머물던 왜인이 점차 일본으로 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

문제의 해답

이러한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이 공통적으로 숨기고자 한 것은 1591. 1. 28 황 상사가 부산에서 서계로 보고한 것이 2. 6에 조정에 도착한 것과 2월에 일어난 정철의 건저에 대한 선조의 거부였다. 이 두 사실을 숨긴 것은 누군가를 위해 숨겼다는 것을 추측할 수가 있다. 선조실록은 물론 선조수정실록도 내용을 왜곡하면서 숨겨야 했다면 그것은 절대권력자인 선조의 '중대한 실수'를 감추기 위한 것 이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

정철과 조정의 建儲 제기는 묘하게도 이순신의 발탁이 이루어지는 1591년 2월이다. 건저의 이유는 많겠지만 그 시점이라면 왜란대비가 들어가 있었을 개연성이 아주 크다. 그런데 선조는 ‘내가 아직 나이 40인데!’하면서 이를 기각하면서 진노하였다. 이유에 어쨌든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가 진행 중인 시점에서 그런 판단은 일본의 침략을 별 것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 된다. 그 이후 동인들은 백성들의 소란을 먼저 진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철과 서인들을 실각시켜 나간다.

임금의 뜻은 모든 신하들의 행동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당시 오억령이 일본의 침략을 강하게 경고하고, 황진과 허성, 조헌 등이 침략을 주장했었지만, 조정은 민심을 소란시킨다고 모두 기각했다. 선조가 建儲시에 내린 판단에 모두 group think를 해버린 것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실록을 편찬한 시점의 군주인 광해군이든 인조든 선조의 아들이나 손자다. 선조가 임진왜란 대비 소홀에 대한 원인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私家의 서류에 적는다는 행위는 삼족이 죽어나길 일이다. 선조실록이든 선조수정실록이든 당시의 기록은 모두 사초가 불타 없어져서 私家의 서류를 모아서 편찬한 것이라는 점을 직시하라. 누가 私家의 서류에 적지 못한 내용을 실록에다가 적을 수 있겠는가!

진실한 역사의 모습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송강(정철)연보 등을 대조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제자리에 찾아서 넣으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나온다.

1590, 仲冬 일자불상
秀吉이 “일본국 關白은... 한 번 뛰어서 곧바로 大明國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帝都의 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 싶다. 귀국이 先驅가 되어 入朝한다면 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답서를 써 보냈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3월 1일자. 수정실록은 그 달의 모든 일을 1일자에 기록하였다)

1591. 1. 28.
통신사가 동래부에 도착했다. 종사관 허성과 성천지를 동래부에 수감했다.(선조실록 선조24년 2월 6일자)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부산으로 돌아와 정박하자 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馳啓하면서 ‘필시 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3월 1일자).

1591. 2. 6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 도착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선조실록 동일자)
[ ‘필시 兵禍가 있을 것이다.’라는 서계도 도착하였다.]

1591. 2월 일자불상
정철이 어전에서 세자를 세우자고 건의하였다. 부제학 이성중과 대사간 이해수가 ‘이는 정철 혼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신 등과 함께 공론으로 의론한 것이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내 나이 아직 40인데 하며] 진노하였다. 성중과 해수는 바로 좌천되고, 정철은 퇴청하여 사직을 요청했다.(송강정철 연보)
특지로 이성중이 충청 감사로, 이해수가 여주 목사로 좌천되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2월 1일자)

1591. 2. 11.
의금부가 허성을 잡아 가두었다(선조실록 동일자)

1591. 2. 12.
李薦ㆍ李億祺ㆍ梁應地ㆍ李純臣[李舜臣인지 李純信인지 불분명하다.]을 남쪽 요해지에 定送하기를 비변사 낭청이 청하자 임금이 그리 분부하였다(선조실록 동일자)

1591. 2월 일자불상
李舜臣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2월 1일자)
정철이 세 번이나 자신의 교체를 요청해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송강정철 연보)
정철을 영돈녕부사로, 이양원을 우의정으로,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삼았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2월 1일자)

1591. 2. 16.
간원이 전라 좌수사에 초수된 李舜臣의 체차를 청했으나, 임금이 불허했다.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선조실록 동일자)

1591. 3월 일자불상
통신사 황윤길 등이 [1달이나 지난 시점에] 복명하니 상이 引見하고 하문하였다.
윤길은, 전일[1월28일자]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3월 1일자).
이항복은 “그때 함께 정원에 있으면서 성일에게 물어보았더니, 성일도 깊이 걱정하면서. ‘남쪽 지방 인심이 먼저 요동하니, 내가 비록 장담해서 진정시켜도 오히려 의심을 풀지 않을 것이다.’ 했다”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8년 1595년 2월 6일자)
유성룡이 성일에게 물으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3월 1일자).
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모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고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3월 1일자).
宣慰使 吳億齡이 ‘내년에 길을 빌어 上國을 침범할 것이다.’고 확언하는 玄蘇 말을 듣고서 즉시 啓聞하니, 조정의 의논이 크게 놀라 즉시 아뢰어 체직시키고, 응교 심희수로 대신케 하였다. 억령은 이때에 일의 기미가 위급함을 알고서는 미움을 사는 것도 피하지 않고 모두 말하였는데, 결국 밀려나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3월1일자)
옥천에 있던 조헌이 일본의 서계에 분개하여 침략에 대비할 것을 아뢰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3월1일자)

1591. 윤3월 일자불상
倭使 平調信ㆍ玄蘇 등이 서울에 왔다. 黃允吉ㆍ金誠一 등으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였다. 현소가 “만약 조선에서 먼저 奏聞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이다.”하니. 성일 등이 大義에 비추어 옳지 못한 일이라고 타이르자, 현소가 “옛날 고려가 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이다.”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윤 3월1일자)

1591. 4월 일자불상
임금이 倭情을 중국에 주문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논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 주문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윤]두수는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중국 조정에 奏聞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하고, 이산해는, “우리가 왜국과 통신하였다는 것으로 죄책할까 염려됩니다.”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4월 1일자)

1591. 5월 일자불상
부제학 김수가 “平秀吉은 狂悖한 자로, 그의 말은 겁을 주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실상이 없는 말로 陳奏하기까지 하는 것이 사리상 어찌 합당하겠습니까.”하자, [황]정욱은 “지금 이러한 말을 듣고서 어찌 태연히 있으면서 주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설사 침범할 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서계가 이와 같다면 주문해야 한다. 그들이 꼭 침범할 것이라고도 하고 꼭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하는 것은 소견이 다른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전일 윤두수의 말도 이와 같은 점을 염려한 것이니, 주문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하자, 다음날 아침 李山海ㆍ柳成龍ㆍ李陽元 등이 “일본에 잡혀갔다 도망해 온 金大璣 등에게서 들었다고 말을 만들어 주문하는 것이 가장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5월 1일자)
賀節使 金應南의 행차에 대략 倭情을 갖추어 전해들은 말이라고 일컫고서 예부에 자문을 보내기로 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5월 1일자)
평의지가 또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 않고 邊將에게 다시 이야기하여 변장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었으나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평의지가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후로 해마다 조공오던 왜선이 다시 오지 않고, 館에 머물던 왜인이 점차 일본으로 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5월 1일자)

1591. 10. 24
주청사 韓應寅, 서장관 辛慶晉, 질정관 吳億齡 등을 명나라에 보냈다.
[5월에] 聖節使 金應南이 갈 적에 왜적이 중국을 침범할 뜻을 갖고 있음을 禮部에 移咨했지만, 通信使의 왕래를 말하지 않았는데, 중국의 兵部가 우리나라에 그 사실 여부를 물어 와서 다시 주청사를 보내어 그간의 곡절을 해명하려는 것이다(선조실록 동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