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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말했듯이 벼슬길이 선생의 본뜻이 아니었다. 그러한 정황은 퇴계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에 나타나 있고, 자제들의 훈계한 말씀에도 드러나 있다. 선생의 철학사상은 퇴계선생의 이기론이나 심성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퇴계선생의 학문과 교육목적이 "수양"과 "실천"에 있었는데 선생도 그대로 이어 받아 이를 실천하였다. 수양과 실천은 수기지학인데 모든 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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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학문은 [퇴계선생언행록]을 통하여 확인되듯이, 이기론, 심성론에서, 예학까지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었다. 선생이 남긴 저술로 보면, 이기론이나 심성론에 관한 저술보다, 예론에 관한 것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선생을 퇴계 철학의 핵심인 이기론 심성론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 대표적인 제자로 보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퇴계선생 몰 후 선생은 [퇴계선생언행록], [퇴계선생사전]을 저술하여 스승의 학문과 언행을 어느 제자보다 생생하게 전해 주었는데, 그것은 선생이 스승의 학문을 가장 심도있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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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퇴계선생문집}을 선생이 주관하여 교정하였고, 나주 목사 재임시 스승의 대표적인 저서인 [성학십도], [계산잡영], [주자서절요], [자성록]을 출판하여 스승의 업적을 정리하였다. 다만 선생은 '이발기발(理發氣發)'이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의보다 '수양'과 '실천'의 학문을 지향하고 궁구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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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말했지만 이상은 교수에 의하면 퇴계언행록 가운데 제자들의 물음에 선생이 답한 것이 총663항목이다. 그 중 학봉선생의 물음이 198항목으로 전체의 30%이다. 선생의 문목 198건을 다시 분석하면, 학문 54건, 행실 63건, 출처 26건, 논의 48건, 기타 7건으로 되어있다. 198건 중 행식, 출처는 실천에 관한 것인데 둘을 합치면 89건이다. 실천에 관한 문목이 거의 반이다. 그만큼 선생은 "아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실천에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선생의 학문이 엄정하고, 벼슬에 나가서는 청관으로 청명을 지켜 "실제로 옳다고 믿고 있는 바(실지(實知)"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평소 자기 성찰에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의 평생에 다음과 같이 말한 한마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평생 체득하고 있다. "나의 허물을 말해 주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고, 나의 장점을 말해 주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학봉선생언행록]

..선생의 정치사상은 도학적 정치철학에 의한 유교적 정명주의(正名主義) 이념이다. 선생은 천인합일의 경세사상을 지향하는 위민정치(爲民政治)를 근본으로 하여 민심을 천심, 제왕 수령 방백을 어버이로, 백성들 민생 안정을 최우선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선생은 퇴계선생 심학의 연원을 계승했다.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를 비롯하여 이 방면 학자들 공통 견해에 의하면, 선생 당대의 문도 장흥효(張興孝)에서 20세기 김황(金榥)까지 400년간 학봉학파의 학문적 전승체계가 중단 없이 이어진 것이 학봉학파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한다.

이황(李滉) - 김성일(金誠一) - 장흥효(張興孝) -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 김성탁(金聖鐸) 이재(李裁) - 이상정(李象靖) - 류도원(柳道源) 류장원(柳長源) 남한조(南漢朝) - 류치명(柳致明) - 김흥락(金興洛) 김도화(金道和) 이진상(李震相) - 곽종석(郭鍾錫) 권상익(權相翊) 이인재(李寅梓) 김병종(金秉宗) - 김황(金榥) (윤천근, 김성일의 문파, [안동시사2], 안동시, 1999, p.311)

..위의 표는 퇴계선생을 계승한 학봉선생 문파의 중심축을 도표로 보인 것이다. 안동대 윤천근교수는 이러한 학봉선생 문파에 대하여 "김성일 계열 문파는 방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장흥효, 이휘일은 당대의 학자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나, 끝까지 산림처사로 남아 벼슬하지 않았고, 이현일은 과거를 하지 않고 학문으로 이조판서까지 오른 학자. 정치가였다"고 학봉문파의 특성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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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학봉학파의 계보에서 조선 말기에 해당하는 김흥락부터 김황까지의 시대는 서구수용이라는 파고 속에서 보수와 개화의 갈등 격동기였다. 이런 국난기를 맞은 이들은 의병대장으로 창의하거나, 혹은 1, 2차 유림단사건(파리장서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되었고, 이들의 학문을 이은 제자들 또한, 항일 독립운동가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이를 두고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학봉문파의 중단 없는 실천유학 전승체계의 특징적 전개 양상"이라 말하고 있다.
선생은 자제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선생의 학문관이 곧 교육관이었다.

군자는 마땅히 심학을 먼저 할 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만 과거 보는 일로써 전심하게 된다면, 비롯 장원급제를 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이욕(利慾)에 유혹되지 않는 사람이 적을 것이니, 너희들은 두렵지 않겠는가? [학봉선생언행록]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선생이 보는 성리학의 본질은 스승 퇴계의 가르침과 같이, 오직 '수양'과 '실천'을 근본으로 하는 위기지학에 있다. 이익의 추구가 학문의 목적이 아니라 인격적 자기 발전에 학문의 목적이 있다고 믿는 신념이다. 다시 말하면 선생의 경세사상은 도학적 정치이념에 근거한 민본주의에 근본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생이 남긴 저술 일반에서 선생의 소신과 신념으로 밝게 나타나 있는 천인합일 사상이다. 다시 말하여, 천인감응설을 밑바닥에 깔고, 인의(仁義)의 위민정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이 일이관지(一以貫之)한 경세의 사상이다.

 
십오대방손(十五代傍孫 鱗 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