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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2년, 1589년 선생 52세시 9, 10월 사이에 의정부 사인에서 예빈시정으로 옮겼다. 일본의 관백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에 통신사를 청하려고, 그의 심복 평의지(平義智)와 승 현소(玄蘇)를 조선으로 보냈다. 이들이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러 있었다. 선생이 업무상 이들과 자주 만났다. 그 연유에 실무에 밝고 경륜이 있다 하여 부군이 통신부사로 차임되었다. 그 때 백관들은 통신사행을 모면하려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위로에 선생은 "왕명이라면 뱃길 풍파의 위험 따위를 어찌 마다할 것인며, 무엇인들 꺼리겠는가? 내 자질이 중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울 따름일세"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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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3년, 1590년 선생 53세시 3월 5일, 상사 황윤길(黃允吉), 서장관 허성(許筬)과 사은숙배하고, 5월 1일 부산 다대포에서 출항하여 선상 3박 4일만인 5월 4일에 대마도에 기항했다. 첫 기항지 대마도에부터 왜는 외교 의전에 어긋나는 응대를 하였다. 국분사(國分寺)라는 절에서 접빈 책임자격인 평의지를 기다리는데 평의지가 가마를 타고 계단을 지나오므로, 선생은 그 무례함을 질책하기 위해 함께 자리를 뜰 것을 청했으나 황상사가 듣지 않았다. 선생은 "만약 그대로 앉아 수작한다면 이는 곧 임금을 욕 되게 하는 것이다"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니 서장관 허성도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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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본 사행시 행적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조 해당 일자의 기사와 {국조보감} 등에 실려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이에 당황한 평의지는 즉석에서 가마꾼 목을 베어 사죄하였고, 이후 선생은 황상사가 나라 체면을 소홀히 하는 처신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의전 절차에서 왜인들이 무례 방자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예로써 바로 잡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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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한일 외교 관례상 선례가 되므로 매우 중요한 사안인데, 황상사는 "오랑캐니 탓할 것이 못 된다"고 하면서, 선생의 주장을 못마땅하게 여겨 일본 사행시 정사와 부사의 갈등은 일본 기항시에서부터 출국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뒷날 실록을 비롯해 역사서에 사실대로 기록되어, 선생의 엄정한 기개가 높이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본 땅에서 선생에 대한 경모의 정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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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기항지 대마도에서 6월에 출항, 왜의 국도로 가는 중간 기항지인 일기도(一岐島)에 올랐다. 상사와 서장관이 날마다 역관을 보내 평의지에게 관백이 있는 국도를 향해 떠날 것을 청했는데, 평의지가 타고 가는 말 뒤를 우리측 역관이 도보로 쫓아가며 졸랐다. 선생은 "역관이 당하는 욕은 사신이 당하는 욕이요, 사신이 당하는 욕은 임금이 당하는 욕이다. 우리가 앞서 떠나 버린다면 사신을 호위하는 부대가 뒤쫓아오기 바쁠 터인데 하필 의지에게 품신하여 허락을 받고자 함은 치욕이다?" 하였으나 상사 황윤길은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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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바다를 건너 왜의 국도에서 백리 외곽인 항구 계빈(堺濱)의 인접사(引接寺)에 잠시 머물렀다. 서해도(西海島)의 왜인이 와서 사신에게 음식을 바쳤을 때였다. 음식을 이미 다 나눈 뒤, 발견된 전달문서에 "조선사신이 래조(來朝)하였다"는 말이 씌어 있는 종이가 나왔다. 래조(來朝)란 말은 지체 낮은 나라 사신이 지체 높은 나라를 찾아 왔다는 뜻이다. 선생이 상사와 서장관에게 이러한 왜의 오만 방자함을 논하니 "무지한 오랑캐를 탓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선생이 음식을 바친 왜인에게 질책하였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남을 시켜 글을 쓰게 하여 바치다 보니, 천만 실수하였습니다. 새로 써서 바치겠나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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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에 왜의 국도에 들어갔다. 풍신수길이 여행 중이어서 왕명을 전하지 못하고 무료히 기다렸다. 8월 2일 선생은 성장관과 대덕사, 대선원, 정수원, 홍림원, 금모각 등지를 둘러 봤다. 8월 29일 주산(舟山)에 올라 왜국 국도를 조망하였다. 관백과 만나는 절차에 대해서도 댓돌밑 뜰에서 절하는 정하배(庭下拜)냐, 마루 위에서 절하는 영하배(楹下拜)냐로 의견이 갈렸는데 선생이 외교의전 관례를 들어 영하배가 적절함을 주장, 이후 한일 외교 선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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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길이 돌아와 국서를 받으려고 하지 않아 접견이 지체되고 있었다. 어떤 자가 수길 주변의 유력자에게 뇌물을 주어 국서를 주고 빨리 귀국하는 방책을 귀뜸했다. 상사와 서장관은 그 제안에 동의했으나 선생은 응하지 않았다. 9월에 평의지가 와서 왜인들을 위해서 우리 아악단의 연주를 차용하고자 하는 부탁이 있었으나, 선생이 사유를 들어 불허하였다. 왜승 종진(宗陣)이 선생을 찾아와 {대명일통지}를 보여 주는데 거기 수록 된 조선 풍속이 실제와 달리 비속한 것이 많았다. 선생이 그 오류의 항마다 주를 달아 바로잡은 책자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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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이 그 뒤 일인들이 보물로 여긴 [조선국연혁고이(朝鮮國沿革考異)]와 [풍속고이(風俗考異)]이다. 종진이 감격하여 그 책자를 관백에게 보였다. 선생은 일본 사행시 느낌을 시로 옲기도 하고, 중요 일정과 사항은 기록하였으며, 찾아오는 학자나, 승려들과 응대하여 문답한 것이 많은데 뒷날 선생 문집에 실렸으며 중요 사서에 전재 수록되어 이후 한일외교사의 중요 전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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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에 수길에게 마침내 국서를 전했는데, 4일이 지나서야 답서를 곧 만들어 보낼 테니, 사신들은 백리 밖 계빈(堺濱)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상사 이하 제관들은 무료함에 지친 듯 짐싸기에 열중했다. 선생은 왕명을 저버린다며 불가함을 조목조목 말했으나 황윤길은 듣지 않았다. 선생은 내키지 않았으나 상사를 뒤따라 백리 밖 항구로 나왔다. 이 사이 [입도출도변(入都出都辨)](일본내 행차 이동시 상사와 서장관이 관복이 아닌 편복 차림을 비판한 내용)과 [왜인예단지(倭人禮單志)](왜인들의 무례함을 비판한 내용)를 지었다. 보름만에 답서가 왔는데 내용에 방자 해괴한 구절이 있었다. 이 때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읊은 시가 있다.

 
예의야 오랑캐와 중국이 어찌 다르리오
있으면 중국이고 없으면 오랑캐네
생사 때문에 나의 절개 변하지 않으리니
이 도(道)는 예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거네

..'전하'를 '각하'로, '예폐'를 '방물'로 격하하고, 본문 중 "곧 바로 명나라로 쳐들어가려 하는데 귀국이 먼저 달려와 입조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선생은 답서를 가지고 온 왜승 현소에게 부당함을 강력히 질책하여 되돌려 보냈다. 그 결과 각하(閣下), 방물(方物), 령납(領納) 6자만 고치고, 해괴 방자한 문구는 그대로였다. 상사와 서장관은 몇 자 고쳐 온 것만도 다행이라며 서둘러 귀국하자고 했다. 선생은 이대로는 안 된다며 승 현소와 선위사인 평행장(平行長)에게 편지를 써서, 조선과 명과 일본과의 교린외교 선례를 근거로 들면서, 그 천만 무례함을 끝내 시정하려 하였다. 결정권은 상사 직권이므로 갖은 방해로 실행하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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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다. 관백 풍신수길의 관저로 영접되어 통신사 행차가 관저로 들어 갈 때다. 관저 대문에 "시문(是門, 이것이 문이다)" 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정사와 서장관은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선생은 "저 종이를 당장 떼도록 하여라" 명하였다. 선생 분부대로 종자들이 글씨를 뗀 뒤에 문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사람들이 선생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시(是)'자에는 저들의 사악한 저의가 있다. 문에다가 '여기가 문이라'는 표시를 왜 하겠느냐? 글자를 풀이하면, '시(是)'는 곧, 일(日)의 하인(下人)"이 아닌가" 하였다. 듣는 자들이 경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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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행차하고 머문 7개월 동안 왜의 학자 승려들이 다투어 선생에게 한 줄의 글, 혹은 한 마디의 말씀을 구하였다. 문목(問目)에 답을 써 주기도 하고, 혹은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으며, 특히 {대명일통지} 조선관계 기사를 바로잡은 [조선국연혁고이 및 풍속고이]를 지어 왜승 종진에게 주고 온 사실은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일본에서 사신 행차가 시가지를 이동 할 때 편복을 한 상사와 서장관(일본 가마가 낮아 불편하다는 구실이었지만 귀국 후 조야의 비판을 받았음)은 도성의 그 많은 구경꾼들이 거뜰떠 보지도 않았는데, 예복 정장한 선생에게는 정중히 경의를 표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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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일본 사행시 한 일본 학자가 선생에게 조선은 예문의 나라로 초상 장례 범절에 법도가 있다고 들었는데, 조선의 상복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그림으로 자세히 그려 달라고 청했다. 선생은 조선의 상복을 실물 그대로 자세히 그려 주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전통 복식인 하오리와 하카마가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 구비전승의 이야기가 일본 복식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생이 그려 준 당시 조선의 상복은 일본 복식가에게는 진귀한 견문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선조 24년, 1591년 선생 54세시 2월 선생이 부산에 귀항하여 그 길로 상경 복명하였다. 통정대부로 승진되었으므로 선생이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선조실록은 "상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은 무역하여 행장을 채웠다" 하였으나, 선생 행탁(行 , 여행자의 짐꾸러미)에는 종려목 화분 2개뿐이었다. 상사 황윤길은 나라 체면보다는 왜의 비위에 맞게, 체통을 돌보지 않은데 반하여, 선생은 왕명을 수행하는 일국의 외교사절의 소신으로 일관하였으니 일본 사행 수뇌부는 애초부터 손발이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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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길은 부산에 귀항하면서 장계를 올려 왜가 통신사 뒤를 따라 들어와 병화를 일으킬 듯 보고하는 한편, 동래에서부터 발설하여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선조에게 복명하는 자리에서 황윤길은 "왜가 쳐들어 올 것 같은 조짐이 있습니다. 수길의 인물됨이 담략이 크고 눈이 빛났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신은 황상사가 아뢰는 것 같은 그러한 정황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수길의 눈이 쥐눈 같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불행히도 1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결과적으로 선생의 복명이 맞지 않아 왜의 침공 직후 선생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서애 류성룡 상공이 지은 {징비록}에 의하면 선생이 왕에게 복명을 마치고 나올 때 "그대 말씀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약 병화가 있으면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낸들 왜가 장차 동병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다만 황의 말이 너무 지나쳐, 경향의 백성들이 혼란의 극에 달했기에, 내가 본대로 의혹을 풀어 준 것 뿐일세" 하였다.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임진란 초에 강원도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이 왜군에 사로잡혔을 때의 사실을 기록한 {호구록(虎口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왜장 원개록(源介綠)이 평창을 쳐서 함락하고 두문과 그 아들을 사로잡아 갔다. 하루는 선생(학봉)의 성명을 써 보이며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지금 적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아 영남에 있다" 하였다. 또 "이덕형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었다.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있다" 하였다. 또 "그대 나라에 김성일과 이덕형 같은 인물이 몇이나 되는가?" 하였으니 매우 공경하고 꺼린바가 있어서이다.

..그것은 당시 일본 군진(軍陣)에서 평가하는 선생의 선망과 위치를 시사하는 이야기로 해석 된다. 연보에 의하면 만력 "경인년(선조23년, 1591년)부터 오늘까지 1백여년 동안 일본 통신사로 다녀온 사람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일본 조야의 지식인들이 학봉선생을 존경하여 마지않고 있더라'" 하였다. 그것은 사행시 선생의 위풍당당한 풍도를 이민족인 왜인들이 흠모하여 대를 물려 가면서 공경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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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명 후 왕의 특지로 품계가 통정대부로 승차되고 3월 성균관 대사성 겸 승문원 부제조에 제수 지었다. 선조는 동서분당이 점차 고조되어 학풍이 문란해지는 것을 보고, 명망 있는 학자로 하여금 국학을 관장하게 하려 하였다. 얼마 뒤 선조는 선생을 홍문관부제학으로 제수했다. 명나라 사행의 공로로 광국공신원종일등에 녹선되어 선부군 청계대조에게 이조참의, 모부인에게 숙부인 증직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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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4년, 1591년 선생 54세시 정여립(鄭汝立)의 난 이후 집권세력이 반대당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남명의 문인으로 당대 석학인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한 모함으로 국문과정에서 죽었다. 수우당은 지조가 바르고 행실이 높은 선비로서 세인의 추앙을 받는 학자였다. 누구 하나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이 홀로 어전(御殿)에 나가 억울함을 고했다. 선조는 "경이 어찌 최가 억울하다 말하는가?" 하였다. 선생은 "신은 그 사람의 얼굴도 모릅니다. 그 맘 씀씀이와 이루어 놓은 일이 절의로만 죽을 사람입니다. 평소에 너무 올바른 것이 간사한 무리들의 모함을 부른 것으로 만고에 원통한 일입니다" 하였다. 주위의 신하들은 대단히 위험한 진언이라며 선생 직언에 우려와 긴장이 명멸하고 있었다. 결국 수우당이 신원되니 뜻있는 신하들이 혼쾌히 여기고 선생의 담대한 위품에 백관이 경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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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아우 남악이 별세했다. [연보]에 의하면 선생은 낙연 남쪽 언덕에 옥병서재(玉屛書齋)를 지었다. 아버지 청계대조 정자인 선유정 북쪽에 있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인다. 층암절벽에 벽옥한류가 흐르는 절승가경인데, 고을 사람을 시켜 자금을 모아 집을 짓고 장차 후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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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통신사행차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일본은 명목상 회사사(回謝使)로 풍신수길의 심복 평조신과 승 현소를 파견하여 일본이 명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터 달라고 협박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 일본 침공 조짐을 간파하고, 성을 쌓고 못을 파고 무기를 점검하여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나, 민심이 동요되어 물끓듯했다.


..선조 25년, 1592년 선생 55세시 선생이 옥당에 있을 때 이미 임금에게 진언하기를 "두려워 할 것은 민심입니다. 왜의 침략보다 민심의 붕괴가 더 중대합니다. 민심이 허물어지면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있어도 소용 없습니다" 하였다. 각종 부역에 시달려 특히 영남지방 백성들이 더욱 소란했다. 이 때 영남에 유능한 병사를 파견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어 적임자를 물색하였으나 무관(武官)에는 적임자가 없었다. 4월 11일 선조는 부군에게 경상우병사를 제스하였다. 선생이 남행길을 떠날 때, 조정 중신들이 위문하였다. 선생은 "지금 정황으로 보면 나는 나라에 죄가 있는데 중책을 맡았으니 천은이 망극하다. 죽지 않으면 마땅히 진력할 것이다" 하였다. 이 때 읊은 "한강유별(漢江留別)"이라 제한 시가 있다.

 
도끼자루 짚고 남행 길 오르니
외로운 신하 한 번 죽음이 가볍구나
남산과 한강수를
뒤돌아 보니 유정하구나

..충주에 이른 선생은 왜의 군선이 쳐들어와 부산 동래가 함락 됐다는 말을 들었다. 주야로 달려 의령 정암진을 건너 본진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강을 건너면 적을 바로 만난다 하였으나 무릅쓰고 도강하였다. 전임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 왜군을 피하여 이미 30리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길에 선생과 마주쳤다. 군사는 다 달아나고 가히 단기의 신세였다. 조대곤이 놀라 병사인(兵使印)을 황급히 인계하고 떠나려 했다. 선생은 꾸짖고, 거짓 전황을 보고하는 조병사 비장의 목을 베어 징벌한 다음 정예부대로 전열을 갖추어 남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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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백마을 탄 적병 둘이 은빛 투구, 황금색 가면에 칼을 휘두르며 달려 오고 있었다. 선생을 호위하던 휘하의 군교 금옥(金玉), 이숭인(李崇仁)이 군사를 이끌고 적의 복병들과 접전하였다. 이숭인이 황금가면 적장을 활로 명중시키는 것을 본 적병들은 흩어져 달아나는데, 숭인이 추격하여 적병 둘을 더 베고 말과 안장과 일본도 한자루를 노획하였다. 이것이 선생 출정의 첫 전승(戰勝)이다. 적의 예봉을 꺽은 선생 휘하 군사들 사기가 일신되었다. 적의 머리를 끊어 장계를 올렸는데 첫머리에 "한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함이 신의 소원이라" 하였다. 선생의 비장한 결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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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선생에게 나명(拿命)이 내렸다. 이 소식에 접한 선생은 죄인이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면 즉시 샛길로 급거 상경 길에 올랐다. 이에 선생을 따라 모였던 군사는 다 흩어지고 방비는 허물어졌다. 왜적이 파죽지세로 국토를 유린하며 북상한다는 보고에 선조는 "김성일이 왜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했으므로 내 그를 친히 국문하리라" 하여 의금부에 나명을 내린 것이다. 미리 올라간 선생의 장계를 본 선조는 "김병사의 장계(狀啓)에 '일사보국(一死報國)'이란 말이 있으니 과연 그럴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 곁에 있던 서애 상공, 최황(崔滉), 왕세자 광해군이 이구동성으로 "성일은 일본 갔을 때도 오로지 전하와 나라를 위한 충성뿐이었으므로, 능히 일사보국할 우국 충신입니다" 하였다. 제신들의 한결 같은 말에 격하였던 왕의 노여움이 점차 누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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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거 상경 길에 선생이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왕명을 받든 선전관이 이 쪽을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선생을 따르던 종자들이 당황하였다. 선생은 평상심 그대로 태연하게 오히려 뒷일을 당부하였다. 선전관과 마주쳤다. 나명을 거두고, 사면한다는 전지와 경상우도 초유사(전쟁시 백성들을 무마하여 군비를 증강하는 왕명 특사로 지금의 계엄사령관과 유사한 전시의 임시직)에 제수한다는 교지였다. 선생은 왕의 어가가 북으로 파천한다는 소식을 여기서 듣고, 향후 적을 토벌할 방략과 비책을 모두 적어 선전관 편에 상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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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함양에 닿으니 전부터 친숙하던 전 현감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전 직장(直長) 송암(松巖) 이노(李魯)를 만나 막하에 두고 부관과 참모로 삼았다. 고을 관민들은 적에 쫓겨 산속으로 숨고 부락마다 연기 나는 집이 없었다. 선생은 즉시 士民에게 보내는 초유문을 지었는데 읽는 자와 듣는 자의 눈물을 자아내 충성과 의기가 온 고을에 넘쳤다. 선생이 붓을 들어 단숨에 쓴 이 초유문은 충간의담(忠肝義膽)에서 나온, 폐부를 찌르고 눈물을 머금게 하는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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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곤과 이로 두 사람을 시켜 명망 있는 자로 하여금 군사와 군량을 모으는 소모관으로 임명케하고,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면(金沔), 합천의 정인홍(鄭仁弘)을 의병대장으로 삼아 향병(鄕兵)을 지휘케 했다. 고을 수령들은 다 달아나고 없으므로, 고을의 인사들을 뽑아 가수(假守) 가장(假將)으로 삼아 사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리니, 이로부터 고을마다 수령이 있고, 군대마다 주장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을마다 연락이 되고,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행정 체계의 기틀이 회복되어 점차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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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곽재우는 개전초부터 가재를 털어 의병 군량미로 삼아 적을 토벌하였다. 시기하는 무리들이 그를 혹은 병자라 하고, 혹은 광인이라 하고, 마침내 토적(土賊)으로 몰아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 김수(金 )는 열읍 수령에게 그를 잡아들이라는 특명을 내렸다. 곽재우 막하 병사들은 흩어지고 재우는 지리산에 들어가 숨으려 했다. 이 때 선생이 곽재우에게 글을 보내 격려하고 더욱 분발할 것을 당부하니, 곽재우가 감격해 진충보국을 맹세하였다. 선생이 보낸 글을 깃발에 매달고 사람들에게 보이니, 비로소 재우의 의거를 믿고 감사나 수령들도 방해하지 않아 곽재우의 군세가 다시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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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이 지리산에 피신해 있다가 나와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이 병으로 죽으니, 선생은 김판관에게 명하여 군사 수천을 모아 부대를 조직케 하여 진주성 방비에 대처했다. 성과 못을 수축케 하고, 병기를 수선케 하여 적의 공세에 대비했다. 선생이 단호하고도 결의에 찬 어조로 말하기를 "진주는 호남의 보루이다. 진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어진다. 적의 목표가 호남이니 호남 수비에 소홀하면 만사가 끝난다. 그러므로 진주성만은 왜적의 손에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국조보감}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순신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장악하고 있었고, 김성일은 관군과 의병으로 진주를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적이 금산(金山)을 거쳐 호서로 들어가려 하다가 여러번 실패하자, 오던 길로 되돌아 가서 호서가 함락되는 것을 막았다. 국가는 이 두 도를 근거로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순신과 김성일 두 사람이 철벽 방어한 전공이었다."

하였다. 또 군영에 기강이 없어 병사들이 이합집산이 무상하였다. 선생이 군율을 정했다. 통장 밑에 군졸 열명이 도망하면 통장을 참하고, 통장이 도망하면 도훈도를 참하고, 일군이 다 도망하면 영장을 참하고, 도망하는 자를 보고도 잡지 못하는 자도 같은 벌에 처하도록 포고하였다. 이 군율을 시행하면서 선생은 군졸에 대한 보국진충의 긍지와 개별적 공적을 보장하니, 심복하여 감히 도망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이 진양으로 돌아와 보니 성안이 텅 비어 사람의 그림자가 없고, 남강만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막하 조종도가 "진양은 큰고을인데 이렇게 공허합니다. 차라리 적의 칼날에 죽기보다 저 강물에 함께 빠져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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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웃으면서 "장부가 한번 죽는 것은 어려울 것 없으나 아직 임금의 은택이 다하지 않았으니 하늘이 무심치 않을 것이다. 다행이 제군들 창의로 선비와 백성들 호응을 얻어 일심동체로 적을 쳐부순다면 국토를 회복할 것이다. 불행이 안 되면 적을 죽이고, 우리가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비분강개하여 성중에서 술을 구하여 촉석루 다락에 올라 결사보국을 맹세했다. 그 때 선생이 지은 [촉석루삼장사시]는 비장 강개하여 지금까지 만인에게 회자 되고 있다.

 
촉석루 누각 위의 우리들 세 장사는
한 잔 술로 웃으며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 가니
저 물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의병대장 김면은 낙동강에서 남하하는 적을 쳐서 채색비단과 보물을 두어바리(우마의 단위)나 노획해 선생에게 보내 왔다. 선생은 제2의 초유격문을 지어 각 고을로 보내고, 전군수였던 엄홍을 별장으로 삼고 곽찬을 소모관으로 삼아 사민을 분기토록 독려하였다. 이 초유문이 유포되자 적에 빌붙었던 자들과, 일신의 목숨만을 구하려 하던 아전과 백성들이 뉘우치고 돌아서기도 하고, 산속에 숨었던 자들도 와서 의병에 합류하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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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영을 내려 선악을 구별하여 기록해 두는 선악부를 만들게 했다. 공이 있는 자는 선부에 기록하고, 전쟁을 기피하는 자는 악부에 올리게 했더니, 악부에 올라간 자들 가운데 적의 머리를 끊어 바치며 속죄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선생은 경상좌도 열읍에 초유격문을 보내 의병 궐기를 독려하고 한동안 거창에 머물렀다. 창원의 적들이 진주에 방비가 허술한 걸 탐지하고, 진해의 적진과 연합하여 대규모 진주 침공을 획책한다는 첩보와 함께, 고성 사천 쪽으로 적의 대대적인 부대이동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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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선생은 단성 고을로 달려가 단성, 함양, 산음의 아군 병력을 진주로 급거 이동케 하는 한편, 판관 김시민 막하에 곤양군수 이광악과 최강 이달 등으로 좌우익장을 삼아 방비케 했다. 이 때 곽재우도 진주로 들어와 진주는 군세가 진동하여 떨쳤다. 적이 마침내 진주성 다락앞까지 진격해 왔다. 적이 강물에 가로막혀 멈칫거릴 때 선생이 앞장서서 독전하니, 여러 장수와 병정들이 결사항전하여 적은 그날 밤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 승세를 발판으로 격렬하게 추격하여 마침내 사천, 진해, 고성 등 여러 고을의 실지를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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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경상감사 김수와 의병대장 곽재우 사이에 공다툼을 하는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선생은 먼저 곽재우에게 "그대는 개전초에 이미 전 재산을 바쳐 봉기하여 왜적을 쳐부수었으니, 역대 충신 열사도 그대에게 미치지 못하리라, 지금까지 낙동강 유역이 이만큼 유지된 것은 그대의 공로이니 그 공은 천추만세에 빛날 것이다. 그대가 감사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 치죄한다니 그게 무슨 짓인가? 감사의 죄는 나라가 가릴 것인 즉, 그대가 어찌 공이 다 이루어져 가는 마당에 일신을 죽이고 일족이 망할 어리석음을 자초하려 하는가? 내말을 들으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니 심사숙고하라" 하였다. 선생 첩문을 본 곽재우는 크게 깨닫고 사례하기를 "어찌 제 소견만 고집하고, 합하의 교시를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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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감사 김수에게도 편지를 보내 "국가존망에 격한 감정을 풀고 위급지경을 넘어야 한다" 하였다. 또 선조에게 장계하기를 곽재우의 공을 열거하고, 곽재우가 망언을 해 김수가 자존심을 상했고, 김수가 곽재우를 잡으려 하나, 곽이 역심이 있다 해도, 관병으로는 이미 그를 사로잡을 수 없으며, 소신의 편지를 읽고 곽이 깨달아 적을 퇴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을 선생은 소상히 상주하였다. 또한 선생은 도민(道民)이 감사(監司)를 모욕함은 아무리 애국이라도 천만 잘못이나, 지금 영남전역 형편으로 곽이 없으면 남은 여러 고을을 보전키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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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에게도 관용하라는 글을 보내면서, 곽의 충절은 일도(一道)의 아동주졸(兒童走卒)이 주지하고 있는데, 만약 반역이라는 죄로 다스린다면, 본인이 불복은 물론, 일도의 인심을 수습할 길이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 선생의 장계를 보고 시말을 헤아려 의심을 풀었고 곽재우는 무사하게 죄었다. 곽재우는 선생의 은혜에 사례하고, 계속해 선생의 편달과 격려를 받으며 공을 쌓아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것은 선생의 넓은 국량과 용의주도한 상황 판단에 의한 대승적 구국 충절의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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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사람 60여명이 장문의 글을 지어 가지고, 산중 샛길을 택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선생을 찾아 왔다. "경상좌도의 의병도 선생의 지휘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과, 각 고을 수장들이 의병을 방해하여 모병이 어렵다"는 청원이었다. 선생은 이름있는 선비 권응수(權應銖)를 대장으로 삼아 결사 항전을 당부해 돌려보냈다. 권응수는 초유사의 공식 임명에 감격하여, 하양 의병장 신해 등과 네 고을 의병부대를 통솔 분기하여, 영천에 웅거한 적을 쳐 주력을 섬멸하는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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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가을에 좌도가 적의 소굴이 되었으나, 이 방면을 관할할 순찰사가 없다며, 행조(行朝)에서 선생에게 경상좌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제수한다는 교지를 하달했다. 선조가 교서에 "경의 우국충정이 만백성을 움직였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옛터를 회복하는데 경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경에게 경상좌감사직을 제수한다." 고 하였다. 이에 경상우도 군진과 백성들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여론이 비등하여 술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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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도의 의병들과 백성들은 선생이 떠나는 것을 보고, 마치 어버이 잃은 어린 자식같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이 그대로 우도에 머물러 주기를 호소하였다. 선생은 "실정은 가상하나 왕명이니 어찌 내 마음대로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합천, 초계, 삼가, 의령, 진주, 단성 등의 유생들은 박이문(朴而文)을 소수로 삼고, 거창, 삼고, 안음, 산음, 함양 등의 유생들은 진사 정유명(鄭惟明)을 소수로 삼아, 적진을 뚫고 달려가 임금이 있는 행궁에 소를 올렸다. 이 소가 두 패로 올라가니 임금은 즉시 직첩을 원상대로 바꾸는 교지를 다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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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에서 선생은 우도로 임지가 변경됐다는 말을 들었다. 신령에서 안동까지 이틀길이라 고향으로 가서 성묘하고 하루 묵었다. 떠날 때, 온 집안 사람들이 붙잡고 울음바다가 되었으나 선생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평상심과 다르지 않았다. 개구 동화사에 당도하니 좌병사 박진이 병졸을 인솔해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도 의병들이 박병사에게 핍박을 받았다고 하기에, 박진에게 의병을 억압하지 말 것을 타일러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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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우도에서 좌도로 가면서 임금에게 장계하였다. 의병장 권응수가 영천에서 대첩한 전과와, 경주 전투에서 최인배, 정의번 등 17의사가 일시에 순사한 의거와, 류종개(柳宗介)가 싸우다가 관동에서 적에게 죽은 일 등을 주달하였다. 이들이 다 선비로서 의병에 투신한 사람들이라는 것과, 나라에서 인재를 배양한 덕택으로 유생들의 충절 발현이 가능하였다며, "신이 다시 우도로 옮겨가며 좌도의 형편을 실정대로 주달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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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선생은 진주에서 삼가를 거쳐 거창으로 들어 갔다. 적이 파죽의 형세로 위협할 때 각 고을에서 모인 군사들을 이끌고 사력을 다해 분전하여 물리쳤다. 진중에서 선생은 김면(金沔)을 만나 이틀밤을 함께 지내면서 위무하였다. 이 때 가서(家書)를 써서 조카 용(湧), 철(澈), 약( ), 생질 류복기(柳復起)에게 부쳤는데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뿐, 무슨 말을 하겠느냐? 나는 4월 중 명을 받고 이 곳에 왔는데, 적이 사면에 꽉 차 있다. 그러나 생사를 이미 결정하였으니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그곳의 의병은 안집사가 불러 모으지 않느냐, 열읍에서 도망쳐 숨어 버리는 것이 항복하여 동화하는 것과 같으니 온 나라가 오랑캐가 될 것이다. 살아서 열사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이 될 것이니 너희들도 힘쓸지어다."(용은 전임 검열이었는데 길이 막혀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군사를 모아 성을 지켜 적을 목베고 노획한 것이 많았다. 철은 진사로 향병을 이끌고 류종개의 진에 나아가 또한 목베고 노획한 것이 있었다.) [학봉선생연보]

라고 하였다. 그 해 10월, 왜란이 일어난 지 반년이 지났다. 임진왜란 중 삼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으로 불리는 대방어작전이 임박하고 있었다. 부군은 경상좌도의 짧고 바쁜 일정을 마치고 정예기병 백여기를 거느리고, 깊은 밤중에 경상우도 지휘본부로 이동했다. 거창서 산음으로 가니, 우도 의사들은 산속에서 모두 내려와 사민들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합하를 맞아 실지회복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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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감사 김수는 진주를 방어할 수 없다며, 김시민을 김면 진중에 배속하였는데, 선생이 와서 김시민을 다시 진주로 돌려 보냈다. 수령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는데, 선생은 각기 지닌 자질과 능력에 맞추어, 상주, 거제, 함창, 의령, 거창, 문경, 지례, 성주 등에 목사, 판관, 현감을 보임하여, 그 결과를 장계로 주달하였다. 상벌도 문제였다. 장렬한 열사의 공이 묻혀 매몰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남의 공을 제것으로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이 일일이 확인하여 검색하여 확인하니, 우리 양민의 머리를 잘라오는 범죄가 없어졌다. 정인홍 같은 의병장도 상을 받고자 공로를 과대포장 했다가 견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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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산음 군막에서 심상찮은 첩보를 접했다. 창원의 적이 부산, 김해의 수만의 적과 연합해 진주성을 향하고 있다는 첩보였다. 목사 김시민에게 전령하여 일사보국의 방어를 당부하고, 곤양군수 이광악, 진주판관 성수경, 만호 최덕량, 이찬종에 전령하여 철벽방어를 지시했다. 선생은 만의 하나 적이 길을 나누어 침입하여 정진(鼎津)을 건너면 경상 강우 일대와 호남으로 가는 직통로가 허물어질 것을 우려하여 의령으로 달려갔다.
선생은 산음, 단성, 삼가, 의령 4읍의 관병과 의병을 전부 정진 기슭에 포진토록 했다. 그 결과 강을 건너지 못한 적군은 진주를 열겹으로 포위하여 적진이 수십리에 뻗혔다. 선조실록은 이 때 왜군 병력 규모를 3만이라 기록하고 있다. 선생이 당시 왕에게 올린 장계에 의한 숫자일 것이다. 선생은 정예 결사대로 하여금 야음을 틈타 적진을 뚫고 성으로 들여보내, 거듭 성의 사수를 엄명하고 다수의 밀정을 풀어 적의 동태를 감시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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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 등도 미리 와서 천여명 군사로 살천에 진을 치고 군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5일 선생의 지휘를 받은 진주목사 김시민은 성문을 굳게 닫고 철통 방비 태세에 돌입하였다. 적장 하시바가 이끄는 적군 3만이 대나무를 베어 만든 비루(飛樓)에 올라 총을 쏘며 총공세를 취하자, 성중에서 이에 대항 화약을 장착한 큰 화살을 쏘아 비루를 닥치는 대로 파괴하여 적군의 접근을 봉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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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곽재우가 분기하여 진주성 방어 지원에 바섰다. 적은 11일 밤을 최후의 결전 일로 잡아 총진격을 시작하였다. 조선 측은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는 한편, 끓는 물을 성 아래로 붓고, 큰돌을 성 아래로 굴리니, 적의 선봉은 무력화되고 사상자는 크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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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3만 군사로 7주야를 두고 진주성을 공략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엄청난 사상자를 낸 채 패퇴하였다. 이 싸움이 임진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진주에서 승전보가 당도하니 선생은 승전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여 말하기를 "성이 무너졌으면 진주 부내 수만 목숨이 어육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고을의 초토화는 물론, 호남일대가 온전치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막하 종자들이 승전을 하례하였다. 선생은 말씀하기를 "이번 전승은 목사 김시민의 공이었고, 여러 장수의 힘이었다. 다만 적을 치는데 김시민과 같이 하면 어떤 위험인들 걱정을 하겠느냐, 이번 승전은 진충보국한 여러분들의 공로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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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김시민의 전공을 장계하여 시민을 바로 경상우병사로 승진케 조치했다. 조정은 선생을 가자하여 가선대부로 승차하였다. 선생은 진주성으로 가서 지그전에 가히 초죽음이 된 여러 장수들의 승전을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격전의 병화가 스치고 지나간 뒤에 기근과 전염병이 찾아왔다. 선생이 지나는 곳에 굶주린 백성들이 아우성치고, 숙소 뜰이 기민으로 가득 찼다. 쌀과 소금을 나누어주고 여러 고을에 영을 내려 진휼장(賑恤場)을 설치케 했다. 이 때 선생의 임지 도착부터 순국까지 경상우도 본영 군진일정과 동정, 생민의 참상을 실상 그대로 기록한 책으로 {용사일기(龍蛇日記)}가 있는데 선생의 막료인 이로가 지은 것이다. 이 책은 선생의 순국 항전을 여실히 기록한 신사(信史)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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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6년, 1593년 새해 아침이 밝았다. 정월 초하루, 군수와 휘하 장수들이 신년하례차 왔을 때, 선생은 강개한 낯빛으로 "해가 바뀌어도 왜적이 나라안에 가득 차 있고, 멀리 계시는 임금 소식은 묘연하니, 죽지 않은 외로운 신하가 또 새해를 맞으니 무슨 낯으로 우러러 하늘의 해를 보겠는가?" 하였다. 선생은 이 해 3월 초 4일 마지막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는데 군량미, 기민 구휼미의 태부족 등 군수물자 조달의 어려움을 토로한 그 내용은 실로 참담하였다. 선생이 올려 보낸 장계가 일일이 주달되지 못하여 논공행상의 차질과 신속한 기민 구휼에도 차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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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할 때, 마침 특파한 막료 이로가 행궁에서 서애 유성룡을 만나 선생의 장계와 서찰이 전해짐으로써 현지 사정이 왕에게 주달 되었다. 마침내 호남양곡 2만석을 경상우도로 수송하라는 왕명이 하달되었다. 어느 날 선생이 진주에 오니 굶어 죽은 송장이 널려 있고, 봉두난발의 기민들이 몇 백명씩 떼를 지어 길가에 엎드려 울면서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선생은 죽을 끓이고 약을 다리게 하여 친히 무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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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림병 환자들 신음소리에 목이 메인 선생은 조석상을 대하여도 수저를 잘 들지 못했다. 여역( 疫)이 창궐한 것이다. 막료들이 진지를 들지 않으면 병에 걸리기 쉽다며 힘써 권하면 선생은 "밥이 목에 넘어 가지 않는다" 하였다. 선생은 날마다 문루에 나가 쉬지 않았다. 막하의 사람들이 "여역으로 사람이 수없이 상하고 있습니다. 방안에서도 지휘하시고 호령하실 수가 있으니, 방으로 들어 가셔야 하옵니다" 하였다. 선생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선생은 결국 지나친 격무로 인한 과로로 여역에 걸려 와병하였다. 늙은 의원이 진맥하더니 "병환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李魯)와 박성(朴惺)이 곁에서 탕제(湯劑)를 권하니, 선생은 이를 물리치면서 "내 병은 약 먹고 살아날 것 같지 않다. 제관들은 그만 가서 쉬라" 고 하였다. 선생은 또 이르기를 "명나라 원군이 곧 올 것인데 그들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제관들은 주밀한 계획을 세우라" 하였다. 목사 오운(吳澐)이 문병차 찾아오니, 선생은 "내 운수이니 어찌 하겠는가, 할 일을 쌓아 두고 죽는구나" 하였다. 선생은 의식을 잃어 가끔 혼미할 때 꿈속 말같이 하는 것이 모두 나라 걱정이었다. 선생은 선조 26년, 1593년 4월 29일 진주공관에서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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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잠시 모셨다가 그 해 12월 안동 와룡면 가수천 자좌오향에 장사하였다. 장사 때 광중에서 큰 북 모양으로 생긴 돌이 나왔다. 26년 후 그 돌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지은 "묘방석에 쓰노라" 제하(題下)의 글을 새겼다. "명조선학봉김선생사순지묘(明朝鮮鶴峯金先生士純之墓)"라 쓴 큰 글자 아래 작은 글자로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순의 이름은 성일이니 문소김씨다. 무술년에 나서 계사년에 돌아갔다. 무진년에 문과, 임진년에 경상감사가 되었다. 일본 사행길에 정직하여 흔들리지 않아, 우리 임금의 위엄이 오랑캐 나라에 퍼졌고, 병란에 초유(招諭)의 대명을 받고 도민을 지성으로 감동케 하여, 영남지방에 들어 온 적을 제어하여 막았다. 충성은 사직을 지키게 하였고, 이름은 나라 역사에 길이 전해지리라. 일찍 퇴계선생 문하에 올라 심학의 요도를 들었으니, 그 덕행과 훈업이 천백세에 빛나리라.

..이 짧은 글이야말로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일목요연하게 압축한 일대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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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8년, 1605년 선생은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선(錄選)되고,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에 추증 되었다. 선조 40년, 1607년 사림이 임하의 임천사에 선생을 향사하였다. 광해군 10년, 1618년 한강 정구가 발의하여 임천서원으로 높여 묘호를 존현사라 하였다. 광해군 12년, 1602년 퇴계선생을 향사하는 여강서원에 선생을 배향하고, 인조 27년, 1649년 여강서원에서 [학봉선생문집] 목판본 7권 4책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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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5년, 1664년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신도비를 세웠다. 숙종 2년, 1676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의 증직이 더해지고, 아버지 청계선생도 따라서 참판에서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이어 여강서원을 호계서원으로 고쳐 사액을 받았다. 숙종 5년, 1679년 선생에게 나라에서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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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1726년 밀암 이재(李栽)가 [연보]를 완성하였다. 정조 6년, 1782년 [속집] 5권 3책이 간행되었다. 1813년 순조 13년, 방후손 구와(龜窩) 굉(■)이 지은 묘갈명으로 선생 묘전비를 다시 세웠다. 철종 2년, 1851년 문집 중간본을 출간했다.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미간 유교 [상례고증]과 [조천일기], [북간일기]를 기간 중간본과 합쳐 [학봉선생문집]이란 제호로 영인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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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학봉선생 기념사업회에서 [국역 학봉전집] 활자본을 간행하였다. 1987년 후손들이 금계리 종택 사당 남쪽 빈터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선생 유물전시관 운장각(雲章閣)을 신축하였다. 운장각은 정부 지정문화재 보물 905호(전적261점), 보물 906호(고문서242점)를 비롯하여 선생 수고본, 복식, 문구 등 유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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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학봉 김선생 기념사업회(회장 김홍식)에서 학봉선생 순국400주년기념 학술발표회를 개최하고, 연구논문집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여강출판사, 1993)을 간행했다. 민족문화추진회(회장 이우성) 주관으로 1999~2004년 사이 완간 예정에 있는 [국역학봉전집] 전 6권이 잇달아 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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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안동의 임천(臨川), 사빈(泗濱), 호계(虎溪), 영양의 영산(英山), 의성의 빙계(氷溪), 청송의 송학(松鶴), 하동의 영계(永溪), 나주의 대곡(大谷), 진주의 경림(慶林)서원에 제향되었다. 배위 정부인은 부장 권덕황(權德凰)의 딸로, 묘는 선생 묘소 좌측에 있다. 세 아들이 있는데, 세마 潗(집,) 선무량 ■(■), 장사랑 굉( )이다. 따님이 셋으로 장사랑 홍수약(洪守約), 대사간 권태일(權泰一), 길주목사 김영조(金榮祖)에게 각각 출가했다. 안동 금계리 학봉종택은 13대 종손 김시인(金時寅)옹이 지키고 있다. 감히 선생의 일생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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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선생의 본의는 벼슬에 있지 않았고,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학문의 심화와 실천에 있었다. 그것은 선생이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를 실천하면서 문도에게 가르쳤고 선생의 문도들이 학봉학파(鶴峯學派)를 형성하면서 400년간 퇴계학파의 중심축을 이룬 것으로 뒷받침된다.
..둘째, 선생은 수기치인을 실천한 척사광정(斥邪匡正)의 청백리였다. 대궐 안에서는 일마다 엄정했고, 선생의 은택을 입은 생민들이 마음 속의 어버이로 받들었던 것으로 뒷받침된다.
..셋째, 선생은 통신사 사행에 대일외교의 바람직한 선례를 만든 외교가였다. 방자 오만한 왜를 굴복시켜 자주국의 위상을 관철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선진적인 조선의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였는데, 일본의 학자, 승려들이 선생에게 한 줄의 글, 한 마디의 말을 구할 때, 빠짐없이 응한 것으로 뒷받침된다. 그 때 선생이 일본에 끼친 여파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역대 조선통신사들에 의해 백년 뒤까지 지속되었고, 선생이 일본 국내 학자 승려들 즉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경모의 인물로 부각되었던 사실로써 뒷받침된다.
..넷째, 선생이 김시민 곽재우 등을 지휘하여 이룬 임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은 바다의 이순신과 쌍벽을 이룬 임진왜란의 대전환점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 {국조보감} 등 중요 역사서의 기록으로 뒷받침된다. 만약 번복되기 전의 왕명대로 경상 우감사에서 좌감사로 직첩을 바꾸었다면, 진주대첩 성공 여부는 미지수였을 공산이 크다.
..다섯째, 1,500수의 시를 남겼다. 선생의 시는 효우, 학문, 우국, 경세, 민생, 자연정관의 서정에 이르기까지 광범하여 선생의 삶을 진솔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