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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원년. 1568년 선생 31세시 1월 형님 운암과 퇴계선생을 뵈었다. 물러나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밤이 이윽도록 토론하였다. 4월에 증광향시에 합격하고 6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가을에 승문원 부정자에 보임되어 벼슬길에 나갔다. 선생은 청계대조의 기대 때문에 과거로 출사하였으나 성리 심학의 순수 학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러한 마음을 퇴계선생에 여러 차례 하소연하는 편지를 올렸다.

..선조 2년, 1569년 선생 32세시 봄에 선생은 승문원 정자에 올랐다. 3월에 도임(到任)하고 귀향(歸鄕)하는 퇴계선생을 동호(東湖)에서 전별하였다. 퇴계선생은 지난 해 선조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 왔다가 가까스로 윤허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조정이 텅 빌 정도로 조관(朝官)들이 나와서 작별하였다. 선생의 전별시 두 수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말세라 벼슬길 물러나는 이 없어
명리의 굴레에 몇 사람이나 매였더뇨
여유로운 이 떠나심 유감이야 없지만
한 생각은 도성을 떠나는 시름일세

..고향으로 물러가기를 임금에게 청하던 날에 임금이 퇴계에게 당세의 인재를 묻자 "이준경(李浚慶) . 기대승(奇大升). 김성일(金誠一)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을에 휴가를 얻어 귀성하여 어버이와 퇴계선생을 만나고 청량산에서 놀며 지은 시가 여러 편이 있으며 곧 환조하였다.

..선조 3년, 1570년 선생 33세시 3월에 선생은 섯째형 운암의 상을 당했다. 운암은 중형 귀봉과 아우 남악 3형제가 대과 시험을 위해 서울 객관에 머물다가 병이 위중하게 되었다. 중형 귀봉이 병든 아우 운암을 이끌고 급거 고향으로 가는 도중, 용인 금량역에서 별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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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은 천품(天稟)이 도에 가까워 퇴계문하의 중망이었다. 형의 부음을 듣고 선생은 애통함을 금치 못하였다. 이 해 아우 남악이 대과에 올라 성균관 학유에 보임되었다. 12월에 퇴계선생 부음을 접하고 아우 남악 등 서울에 있는 문하의 제자들이 서울 퇴계선생 댁에 모여 곡하였다. 그 다음 해에 대교에 올랐고 [퇴계선생사전]을 지었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선생의 학문을 대개 말하면, 주경(主敬)의 공부가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동과 정을 겸했으며, 혼자 있어 해이하기 쉬운데서 더욱 엄정했다. 궁리 공부는 체와 용을 같이 하고, 본과 말을 갖추어 진지 실득의 경지에 깊이 이르렀다. 일상의 말과 침묵이 떳떳하기를 공부하고, 기미(幾微)의 띠끌같이 작고 혼연한 순간을 살폈다. 이렇게 해서 평이하고 명백함을 도로 삼되, 남이 미쳐 알 수 없는 오묘함이 있고, 겸허하고 사양함을 덕으로 삼지만, 남이 넘을 수 없는 실지가 있었다.

..선조 5년, 1572년 선생 35세시 상소하여 아무도 말하지 않는 노산묘(魯山墓) 즉 단종의 묘를 릉(陵)으로 격상할 것과 사육신을 복작(復爵)할 것을 청하고, 임금의 덕과 당시 관료들 폐단을 논하였다. 상소문은 선생 문집 속집에 실려 있고, 이것이 논의의 시초가 되어 뒷날 단종과 사육신이 복위되고 복작되었다. 뒷날 선생이 34세시인 1571년 신미년에 초안한 원고를 본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은 그 감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만 명의 사람이 말하려 하는 것을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공언(公言)"이라 하고, 천만 명의 사람이 말하려 해도 되지 않는 것을, 한 사람이 말하여 이룬 것을 "감언(敢言)"이라 한다. 천만 명의 사람이 말하려 해도, 능히 말하지 못한 것을 한 사람이 이를 말하게 되었으니, 이 사람은 천만명중의 한 사람인 학봉선생이다. 단종이 복위 되고 사육신과 금성대군이 잇달아 신원된 것은 모두 학봉선생의 이 소가 발단이다. {금대유고} [학봉김선생신미소원고발]

라고 하였다.

..그 다음 해 7월 병조좌랑으로 옮기고, 휴가차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 갈 때였다. 길가에서 한 촌부가 말을 놓아 풀을 먹이고 있었다. 동행하는 친구가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사람은 효자일세"라고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곧 그 사람을 청하여 인사하고 보니 그는 천민(賤民)이었다. 마루 위에 앉게 하여 손님으로 대접하니, 친구가 선생의 태도를 괴이하게 여겼다. 선생이 말하기를 "착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벼슬이 높아도 미천한 것이나, 착한 행실이 있다면 어찌 미천하다 하여 소홀히 하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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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9월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하루는 경연에 입시하니, 주상이 조용히 묻기를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에 비하여 어느 임금과 견주겠는가" 하였다. 한 신하가 "요순 같은 성군이십니다"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선생이 말하기를 "전하는 요순(堯舜) 같은 성군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 같은 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요순 되기와 걸주 되기가 어찌 그렇게 같다는 말인가?" 하고 다시 묻자. 선생은 "전하께서는 천자가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시기는 어렵지 않으나, 다만 신하가 옳게 간하는 말을 거부하시는 폐단이 있으시니, 실로 염려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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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문득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니 여러 신하가 모두 떨고 있었다. 이 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상공이 앞으로 나아가서 "두 사람이 주달하는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에 비하는 것은 임금을 그렇게 인도하려는 말이고, 걸주에 비하는 것은 임금을 경계하는 말이오니, 다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겨우 얼굴빛을 고치고 술을 내리게 한 다음 물러나게 하였다. 하루는 학문이 높은 근신을 불러 {서경}을 강하는데, 선생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들어 갔다. 강을 마친 다음 선생이 아뢰기를 "조정의 명령이 막혀 행해지지 않고, 수령은 국사를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니 염려됩니다. 전하께서 바로 잡지 않으시면 백성들이 어찌 전하를 따르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씀은 {국조보감}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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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선조는 아직 [행장]이 지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동강(東岡) 이우옹(李宇 )이 지은 묘지를 근거로 내세우면서 "대현을 예우하는데 상규의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율곡이 옆에서 말하기를 "퇴계는 언론과 풍도가 동방의 일인자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 분의 학문을 어찌 언론과 풍도로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로 하여 다음 해 시호를 내렸는데, [행장]이 미처 이루어지기 전에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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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9년, 1576년 선생 39시에 이조좌랑 재임시 가을에 시가독서로 호당(湖堂, 용산에 있었던 독서당으로 문관 중 학문에 뛰어난 자를 뽑아 일정 기간 독서에 몰두하게 하는 제도)에 들어 갔다. 이 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 ) 정여창(鄭汝昌) 두 선생 시호를 내렸는데 선생이 명을 받들어 현지에 내려가 절차를 밟고 예패를 서원에 보냈다. 또 퇴계선생 시호도 부군이 맡아 도산에 내려가 같은 절차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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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0년, 1577년 40세시 1월에 사은사 서장관으로, 정사 윤두수와 함께 명나라로 갔다. 이 때 선부군 청계대조 연세가 80을 바라보는 처지라 임금께 소를 올려 사면을 얻어 보려고, 급히 이런 사정을 청계대조에게 편지로 품하였다. 청계대조 회답에 "내 비롯 늙었으나 아직 건강하고, 너를 이미 나라에 맡겼으니, 염려말고 왕명에 따라 다녀 오라" 하였다.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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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행은 사은의 목적 외에 중대한 사안이 있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잘못 실려있는 태조 이성계의 종계(宗系)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선생이 2월에 서울을 떠나 4월에 북경에 도착, 예부에 나가 절차를 밟았다. 사은사 윤두수는 절차를 일일이 서장관인 부군에게 물어서 시행하였다. 명나라 상서 마모(馬某)가 친히 고쳐 주고, 기록을 몇 줄 더 보태어 지극히 명백하게 처리해 주었다. 7월에 귀국하여 복명하고 고향으로 가서 청계대조를 뵈온 후 상경하여 이조정랑에 승차 보임 되었다. 북경 사행 견문기를 담은 [조천일기(朝天日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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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1년, 1578년 선생 41세에 홍문관 교리로 옮겼다. 이 때 어떤 권신(權臣)이 뇌물을 받은 사건이 드러났는데 선생이 임금께 주달하기를 "지금 빈풍(貧風)이 불어 뇌물 보따리가 성행하니 성명이 위에 있으면서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임금은 큰 소리로 "어떤 자들이 그런가?" 부군이 하나하나 실명으로 고하였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떨고 있었으나 선생은 태연하였다. 다시 이조정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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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2년, 1579년 선생 42세에 사헌부장령이 되어 불의와 부정을 사정없이 바로 잡으니 사람들이 선생을 가르켜 "대궐안 호랑이(殿上虎)"라 하였다. 종실 하원군(河源君) 이정(李 )이 임금의 은총을 믿고 불미한 행동을 일삼아 민폐가 많았다. 선생이 그 집 家奴를 잡아다가 무거운 형벌로 국문하니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하였으나 선생은 평상심과 다름없었다. 2월 3일은 아버지 청계대조 생신이라 휴가를 얻어 별업(別業)이 있는 청기로 가서 형제들과 대소가 친척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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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의정부 사인으로 옮겼다가 가을에 함경도 순무어사로 나갔다. 부군이 온다는 말을 들은 일부 수령들은 인끈을 풀어놓고 달아나는 자가 있었다. 가는 곳마다 피폐한 민정을 바로 잡으니, 백성들이 "어사님은 우리 부모이시다" 라고 하며 감읍하였다. 황초령, 삼수, 길주, 명천, 경원, 종성, 온성을 돌아보고, 아오지까지 북상하였으며, 백두산을 등정하려 했으나 풍설(風雪)이 심해 중지했다. 민생의 질곡과 부정한 관리를 색출 단죄하고, 군졸을 위무 격려하며 변방 오랑캐 추장을 불러 위무한 다음 해인 선조 13년, 1580년 4월에 환조 복명하였다. 이 때 변방을 돌며 선생이 견문한 일기 [북정일록(北征日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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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3년, 1580년 43세시 4월 선생은 근친 길에 올라 청기로 가 청계대조를 뵈었다. 그 다음 달 윤 4월에 청기에서 선부군 상고를 당하였다. 형제들과 주야로 뫼셔 병 구료에 힘쓰다가 대고(大故)를 당하고 안동으로 반구하였다. 집상중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저술했다. 집상을 마친 다음 한달간 중형 귀봉과 백운정에 거처 하였다. 이 때 지은 시 [종상(終喪)]을 보자.

 
상 마친 뒤 뭔 맘으로 집으로 돌아 갈꼬
백운정서 한 달 남짓 머물러 있었도다.
천 줄기의 피눈물은 강물처럼 흐르고
삼년 동안 얼굴 모습 꿈 속에 들었도다
산소 살핌 오랫동안 비바람에 못하였고
몸 어루만지면서 상복 벗음 통곡했다.
하늘 닿는 이내 한을 누가 먼저 알았을꼬
주신 시 세 번 읽자 내 마음 들뜨네

..선조 15년, 1582년 선생 45세시 6월에 청계대조 복상을 마치고 7월에 성균관 사예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부동(府東) 猿谷(납실)에서 부서(府西) 금계리로 이사하였다. 얼마 후 의정부 사인으로 환조하였다. 아버지 청계대조에게 서제(庶弟) 기석(奇石)이 있었는데 떠돌아 다니다가 호서지방에 살았다. 그의 아들이 법을 어겨 충주의 옥에 갇혀 극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석이 선생이 지나 간다는 소문을 듣고 길에서 선생을 만나 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중한 죄수를 사사로이 부사에게 부탁할 수 없다하고 거절하였다.
행차가 충주에 당도했을 때, 목사가 마중 나왔으나 그 일을 선생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떠날 때 옥문 앞에서 옥리를 시켜 죄수를 끌어내 손을 잡고 울면서 "중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위로하며 입었던 저고리와 도포를 벗어 주면서 "죽거던 이것으로 시체를 싸도록 하라" 이르고 길을 떠났다. 옥리가 이 광경을 목사에게 고하였더니, 감탄한 목사가 감일등하는 바람에 목숨을 구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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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6년, 1583년 선생 46세에 사간으로 갔다가 다시 사인이 되었다. 3월에 황해도 순무어사로 나가, 해주를 중심으로 여러 고을을 순찰하여 5개월만에 돌아 왔다. 해이된 군정과 과중한 부역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의 궁핍한 사정을 낱낱이 들어, 장계와 소를 올리고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열읍(列邑)의 백성들을 진무하였다. 뒤에 임진년 난리 때 왜적이 해주를 점거했다. 해주 관아 부용당의 벽에 걸린 현판을 다 없앴는데도, 선생이 지은 시판은 채색비단으로 싸서 보존하였고, 경내 관아는 모두 불태웠으나 부용당만은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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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신(筵臣, 경연에 관계하는 신하)이 임금에게 "나주목사가 비었는데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아, 다스리기 어렵기로 호가 난 고을입니다. 반드시 강직하고 엄정한 내관(중앙관서의 관원)을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7월 복명하기도 전 왕의 특지로 나주목사로 제수 되었다. 선생은 부임하여 백성을 가엽게 여겨 토착사족 부호들을 견제하고, 민정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북을 동헌에 걸고, 호소할 일이 있는 백성은 누구나 와서 치라 하였다. 선생이 투명하게 열린 정사를 편 결과 백성들 원성이 점차 진정 되었다. 선조가 글을 내려 "광명정대한 목민으로 간흉들이 없어져 백성들이 안도하니 가상하다" 하고 비단 옷감 한 벌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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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선비들이 많으면서 서원에 없으므로, 부서 5리 금성산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신축하여 동방 5현을 배향하고, 때로 유생들에게 몸소 경학을 가르쳐 학품을 일으켰다. 퇴계선생 대표적 저술을 출간한 것도 이 때였다. {성학십도}, {계산잡영}, {주자서절요}, {자성록}을 {의례도}, {향교예집}과 함께 나주 본부에서 두 해에 걸쳐 출간하면서 "이런 문자를 상자 속에 두어 후학들이 볼 수 없었으니 실로 유감이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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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8년, 1585년 선생 48세에 큰 형님 약봉의 부음을 받았다. 관청 일을 폐하고 곡하였다. "내 녹봉으로 아버지를 섬기려 하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갔으므로 아버지 섬기는 정성으로 형님을 섬기려 하였는데, 형님마저 돌아가시니 무엇으로 내 마음을 잡겠는가?" 였다. 백형 약봉은 선생보다 16년 맏이로 어려서 자모를 잃었으므로 형에게 의지함이 유별하였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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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9년, 1586년 선생 49세에 나주목사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 왔다. 학도들 앞에서 종일토록 강론하여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그 다음 해인 선조 20년, 1587년 선생 50세에 안동부 서쪽 청성산 낙동강변 층암절벽 경승에 터를 가려 집을 짓고, 석문정사(石門精舍)라 게판하니 학도들이 운집하였다. 방안에 책을 쌓아 두고 단정히 앉아 "초지(初志)가 이것 이었다" 하면서 노후를 학문 연구에 바치기로 하였다. 뒤에 나라 소명이 겹쳐 다시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으나 벼슬이 본뜻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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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해인 선조 20년, 1587년 선생 50세시 겨울에 내앞 큰집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선생이 문중에 건의하여 쌀과 포목을 거두어 가역을 시작, 손수 감역하여 그 다음 해에 준공하였다. 지금의 안동 천전에 있는 의성김씨 안동 천전파 대종택으로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 450호이다. 기록으로 확인할 자료는 없으나 천전 대종택 중건 건물은 전문가들 사이에 선생이 중국 사행시 그 곳 명가의 설계를 참고하였다는 설과, 불타기 전 그대로라는 두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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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1년, 1588년 선생 51세시 7월에 종부시첨정을 제수 받아 환조하였다. 나가 보니 사론이 동서로 갈리어 제 각기 상대방을 배척하였다. 공부, 군정, 대궐 기강 등 시폐를 일일이 상주하여 시정케 하니, 권신들은 선생을 꺼리고, 정승들은 치죄(治罪)를 기다렸으며 임금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서애 상공은 편지를 보내 "김공의 바른 말이 올라가서 주상의 마음을 감동케 하네. 군자의 말씀이 없다면 나라꼴이 되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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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경기경차관으로 옮겼다. 나라에서 삼남의 인가를 북방 빈 땅으로 옮겨 채웠는데, 이 때에 도망해 오는 자가 많았고, 한 사람이 도망해 오면 그 일족과 이웃 사람까지 연좌로 처벌해 민심이 들끓어 비등하고 있었다. 선생이 이 업무를 전면 개혁 쇄신하여 아전들의 부정한 농간을 없애니, 비로소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뒷날 임진 왜란 때 선생 가족이 피난하여 경기지방을 지날 때, 앞을 다투어 음식을 가지고 찾아와 지난날의 은혜를 갚으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