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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학봉종택 안에 중건된 풍뇌헌이 있다. 당연히 상선 하진으로 구성된 익괘의 상사인 "군자는 익괘를 익혀 선을 보면 따라서 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친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써 "바람과 천둥"이라는 그 자의에서 학봉선생의 높고 격절(激切)했던 기상을 느껴보려 한다. 선생의 고절 기상은 비바람 천둥 번개가 지나간 뒤의 광풍제월(光風霽月)처럼 16세기말 선생 임진년의 풍폭(風暴)을 상기케 하여 우리의 가슴을 친다. 선생이 세상에 끼친 학문적 온축에서 그러하고, 벼슬하여 초지 일관한 청직(淸直) 청명(淸明)에서 그러하며, 일본 사행에서의 엄정함이 그러하고, 또 임란 군국이라는 선생의 준열한 우국 충정이 그러하다.

풍뢰헌(風雷軒)은 선생의 장손 단곡(端谷) 시추(是樞)공이 종가 안에 지은 건물의 이름인데 시추공은 부조(父祖)의 유업을 이어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가전의 충효를 이은 매운 의지를 보인 분이다. 학봉선생이 진주성에서 순국한지 300년 뒤, 한말과 일제하 국난기에 11대 주사손 서산(西山) 흥락(興洛)이 의병대장으로 창의하였고, 대를 이어 그 손자 여견(汝見) 용환(龍煥)이 가재를 털어 거액의 독립군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풍뢰헌의 참뜻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천둥 번개로 광명대도의 혼을 일깨우려는 학봉고택 민족정기의 징표는 아닐지? 또 선생 고택 경내 운장각(雲章閣)에 갈무리되어 있는 반천년 가장(家藏) 전적 문서는 국난의 시대, 상실의 시대를 헤쳐 온 민족 진로의 항로를 밝혀 놓은 빛 그 자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문충공 학봉선생 종가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다. 속칭 "검제"라 부른다. {영가지}와 {금계지}에 의하면 "금계"라 부른 것은 조선조 중기 이후다. 지금도 한글 땅이름은 검제이다. 이 마을은 북쪽 천등산 아래 상산과 가봉산에서 발원하는 냇물이 마을의 북쪽인 춘파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나온다. 흐르면서 작은 시내를 거두어 담아. 마을 입구 만운을 지나 송야천 본류와 합쳐진다.

위의 길다란 물굽이를 따라 남남동 방향의 긴 골짜기와 동서 방향의 골짜기로 길다랗게 형성 된 곳이 금계 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부터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로 일컬어져 다른 재지사족촌 보다 형성시기가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충공 학봉선생은 안동 부동 가랫재 아래 서편 마을 납실(猿谷)에 세간나서 살다가 45세시에 안동부 서편 서후의 금계리로 이사하였다.

선생 성은 김씨이고 관향은 의성이다. 이름은 성일(誠一),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종 33년, 1538년 안동부 임하현 천전리에서 아버지 진사 증이조판서 진(璡)과 정부인 여흥 민씨 사이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위로 약봉 귀봉 운암 세 형님과 세 누나 아래로 아우에 남악이니, 선생은 8남매 중 넷째 아들이다. 청계대조의 적극적인 자제 교화에 힘입어, 여러 형님들이 손에 책을 놓지 않은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선생은, 4년 맏이인 형님 운암과 3년 아래인 아우 남악과 한 또래가 되어 유년기를 보냈다. 백형 약봉과 중형 귀봉은 선생보다 각각 16년 10년 위여서 연치의 차가 있었다.

중종 38년, 1543년 여섯 살 때에 {효경}을 배웠다고 한다. [연보]에 위하면 어려서부터 남을 구제할 뜻이 있어 떠돌이 거지를 보면 먹을 것을 구해다 주었다. 또 어느 날 여러 아이들과 가파른 층층바위 위에서 놀다가 한 아이가 바위 아래로 굴러 떨러졌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놀라 달아났으나 선생은 곧 어른들에게 알려서 위급지경의 아이들 구하였다. 이 말을전해들은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기고 옛날 북송의 명상(名相) 사마광(司馬光)이 독을 깨뜨려 독에 빠진 아이를 살려낸 일에 비견하였다.

선생은 7. 8세에 이미 영오(穎悟)한 자질이 드러났다. 여러 아이들과 노는데도 우뚝하게 두각을 나타냈으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결연히 버리고 떠나 조금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 청계대조가 기이하게 여겨 "이 아이는 후일에 지조없이 세상사람 따라 분별없이 살지는 않으리라"하였다. 명종 원년, 1546년 9세에 백형 약봉이 25세로 대과에 올라 벼슬에 나갔는데, 그 해 어머니 정부인 민씨상을 당하였다. 슬퍼하고 사모함이 어른과 같았다. 이 때 선생이 9세, 아우 남악이 6세로 청계대조가 가엽게 여겨 어린 두 아들에게 글공부를 독책하지 않았으나 형님들을 따라 스스로 글을 읽었다 한다.

구전하는 유년기의 일화가 많다. 그중 하나는 이러하다. 어느 무더운 여름에 청계대조가 잠깐 낮잠이 들었을 때다. 구렁이 한 마리가 청계대조를 향하여 기어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겁이 나서 달아났다. 선생은 급히 나가서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구렁이 곁에 놓아 구렁이 진로를 바꾸어서 청계대조가 위험을 면하였다. 나중에 그 말을 들은 청계대조는 아들의 총명을 헤아리고 기뻐하였다.

한 번은 도임하던 신관 사또 행차가 청계대조 댁에 들이닥쳤다. 청계대조는 사또를 맞아 수인사 끝에 찾아 온 까닭을 물었다. 사또는 "김진사께 하례를 드리러 왔습니다. 마을 앞을 막 지나는데 어떤 아이가 내 가마를 향해 오줌을 싸지 않겠습니까. 종자들이 아이를 잡아 온 것을 보니, 잘못한 기색이라고는 추호도 없이 형형한 눈만 깜빡거려, '네가 시를 지을 수 있느냐? 있다면 용서해 줄 것이니라. 아이가 지어 바치는 싯구에

 
사또 어이 먼저 벼슬하고 나는 어이 늦었나요
봄 난촌 가을 국화 제 각기 때가 있다오

라고 했으니 이만 하면 김진사댁에 인재가 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명종 2년, 1547년 선생 열 살 때에 청계대조가 마을 강 건너 부암에 독서당을 짓고 자제들과 고을 수재들을 모아 학령을 세우고 과정(課程)을 엄하게 가르쳤다. 하루는 청계대조가 학동들로 하여금 벌 받을 매를 스스로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 선생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굵직하고 튼튼한 매를 만들어 바쳤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매가 아프지 않으면 경계가 되겠습니까?"하였다.

명종 9년, 1554년 17세이던 겨울에 큰형님 약봉이 홍원현감 벼슬을 살 때 형제들과 함께 임지로 가서 조석으로 범절을 배우며 독서하였다. 하루는 성중에 불이 났는데, 사람들이 모두 달려가서 아문(衙門)의 불을 껐다. 선생은 서적(書籍)을 짊어지고 손으로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로 된 패인 전패(殿牌)를 받들고 조용한 곳으로 피하여 있었다. 형님 약봉이 이를 듣고 "기이하다! 아우는 반드시 학문에 힘써서 큰 선비가 되겠구나"하였다. 그 다음해 겨울에 홍원에서 천전으로 돌아와 섣달에 안동 권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장 권덕황의 딸이다.
명종 11년, 1556년 선생 19세에 처음으로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아우 남악과 소수서원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하루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나서 과거 공부만 하고, 천지만유의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을 모른다면 부끄럽다. 퇴계선생은 당세 사종(師宗)이니 가서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사유를 청계대조에게 품하여 허락을 받고 곧 아우 남악과 걸어서 계상(溪上)서당으로 퇴계선생을 찾아가 뵈었다. 도산서당은 퇴계 환갑년인 1561년에 지었으므로 그 이전까지 학당은 퇴계선생 자택 부근에 지은 계상서당이었다. 퇴계선생은 선생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도산을 왕래하면서 배우고 묻고 하였는데, 선생은 퇴계문하의 중망(重望)으로 무리 가운데 앞서는 자가 없었다. 그 다음 해 학가산에 있는 광흥사에서 독서하였다.

명종 13년, 1558년 선생 21세 2월에 맏아들 집(潗)이 출생했다. 6월에 남악과 도산에서 {서경(書經)}을 배웠다. 인심(人心) 도심(道心)의 나누어짐과 선기옥형(璇璣玉衡, 천체를 관척하는 기계)의 제도를 묻고, 물러나서 형제가 토론하는 것을 보고 퇴계선생이 그 정성스럽고 독실함을 아름답게 여겼다. 퇴계선생은 일찍 지인(知人)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김사순(金士純)이 도산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데, 복더위를 무릅쓰고 산을 넘어 왕래하면서 '서전'의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이 사람은 민첩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므로, 그와 함께 학문을 하고 있으니 매우 유익함을 얻겠다"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김사순의 행실은 고상하고 학문이 정밀하니, 나는 그에 비길 만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명종 16년, 1561년 선생24세기 퇴계선생에게 {역학계몽}을 배웠다. 퇴계선생은 손자 안도(安道)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김사순이 지금 '계몽'을 읽고자 하니, 너도 꼭 내려 와서 함께 읽어라"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즘 김사순을 보면 의취가 매우 좋아 이 일에 전념하고 있다. 뜻을 세우는 정성이 이와 같이 간절하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배운들 이루지 못하랴"하였다. 이 해 겨울에 셋째 형 운암과 함께 {심경}과 {대학}의 의심나는 것을 선생에게 자세히 물었다. 그 해 11월에 퇴계선생의 환갑을 맞아 하례하였다. 퇴계선생은 환갑년에 도산서당이 완공되어 계상서당에서 도산서당으로 옮겼다. 그대로 도산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퇴계선생은 {대학}, [태극도설]을 강론하였다.

명종 17년, 1562년 선생 25세에 상소문을 지어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희릉을 옮긴 일에 대하여 부당함을 논했는데 실제로 소를 올리지는 못했다. 문정왕후가 승 보우의 말을 따라 희릉을 옮기고 중종의 릉인 정릉도 옮기기로 하였는데, 당시 세도가 윤원형이 국사를 전횡하고 있어 조야(朝野)의 그 누구도 말을 못했다. 선생이 비분강개하여 소를 지었는데, 그 말이 굳세고 곧아 칼날 같았으나, 아버지 청계대조가 만류하여 끝내 올리지 못하고, 시 한수를 지어 의분을 풀었다. 가을에 {주자서절요}를 도산에서 강하면서 마음을 굳세게 다잡고 손수 써 가면서 심오한 의미를 탐구하였다.

절구 3수를 지어 퇴계선생에게 올렸더니 선생이 화답한 시에

 
세속 따르니 방해 많아 머리가 희어지고
그대 얻으니 아주 좋아 눈길이 반갑고야

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무렵 선생은 퇴계선생을 모시고 천연대에 올라 갔다. 퇴계선생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선생에게 주었다.

 
밤중에 놀던 신선 꿈 절로 깨어나니
일어나 친구 불러 강대에 올라갔네
맑은 바람 뜻 있어 시 읊는 언저리에 불고
밝은 달은 다정하여 술잔을 비춰주네

그 다음 해인 명종 18년, 1563년 26세시 1월에 선생은 전주 류성(柳城)에게 출가한 숙인 옥정(玉貞) 누님상을 당했다. 숙인은 남편 삼년상을 마치자 절식 순절하니 어린 두 아들이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선생이 데려다가 어루만져 가르치기를 아들처럼 하였다. 뒷날 생질 기봉 류복기는 선생 문도가 되고 임진 창의로 서훈(敍勳)되었으며, 세칭 기도유업이라는 전주류씨 수곡파 성세의 문호를 여는 터를 닦았다.

가을에 진사시 향시에 합격하였다. 다음해인 명종 19년, 1564년 27세시 선생은 진사회시에 합격하였는데 형님 운암, 아우 남악과 동방급제로 집안과 온 고을이 영광으로 여겼다. 이로써 백형 약봉은 일찍 대과에 올라 벼슬에 나가 있었고, 아래로 4형제가 소과에 모두 올라, 뒷날 청계대조댁을 세인들이 오자등과댁이라 부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대장부의 뜻이 과거로 벼슬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고 뜻을 굳게 세워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

다음 해인 명종 20년, 1565년 28세시 선생은 태학에 유학하였다.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의 행동거지와 선악에 임하는 취사선택의 과감성을 보고 팔도의 문사들이 이미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임을 예견하였다. 9월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좋아하는 학문의 길을 가려고, 퇴계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더니 다음과 같은 답서가 왔다.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뜻대로 하겠는가?" 하였다.

선생은 태학에서 이 해 봄부터 가을까지 머물다가 겨울에 환향하여 운암 형님과 함께 도산에서 학업을 닦았다. 태학에서 공부한 기간이 7, 8개월로 짧은 것은 선생의 생각이 성균관보다 도산으로 돌아 와서 퇴계선생에게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퇴계선생이 다음과 같은 시를 선생에게 내렸다.

 

그대가 오가면서 명리 말해 준 것 고맙거니
더위 씻어주는 얼음ㆍ서리 글귀마다 나오네

명종 21년, 1566년 선생 29세시 정월 선생은 도산에서 천전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후 다시 부름을 받고 도산으로 갔다. 퇴계선생은 선생에게 병명을 지어 주었다.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心法)을 차례로 적은 80자를 손수 써서 주며 부탁하는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병명은 다음과 같다.

요(堯)는 공경, 순(舜)은 참되라 하였으며,
우는 공경, 탕은 두려움으로 덕을 닦았네.
공경하고 삼감은 문왕의 마음이요.
넓고도 원대함은 무왕의 정치로다.
주공은 노력하고 조심하라 하였고,
공자는 분발하면 침식 잊고 깨치면 즐겁다 말하였네.
자신을 반성하며 밤낮없이 조심함은 증자가 아니던가.
사욕을 이겨내고 예를 찾아 돌아감은 안자(顔子)가 그러했다.
자신만이 아는 일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명성(明誠)이 되어
지극한 도(道) 이룩함은 자사(子思)이고.
마음을 보존하여 하늘을 섬기며, 올바른 의로 호연의
기(氣) 기름은 맹자(孟子)이시네.
온갖 욕심 다 버리고 조용히 본성 길러, 화창한 날 바람과,
비 갠 뒤 달빛 같음은 주렴계(周濂溪)이고,
풍월을 옲조리며 돌아오는 그 기상, 태양처럼 온화하고 산처럼
우뚝함은 정명도(程明道)이네,
정제하고 엄숙함을 지켜 가면서 전일(專一)을 위주로
변동함이 없으면 정이천(程伊川)이고,
박문(博文)과 약예(約禮)가 다 같이 지극하여
정통(正統)의 연원(淵源)을 이어 받음은 주자(朱子)이시네
(이정섭 옮김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학봉김선생기념사업회. 여강출판사 1993)

이상은교수에 의하면 [퇴계선생언행록]에 있는 제자들의 문목 총 663항목중, 선생이 질문한 항목이 198건으로 전체의 30%이다. 이러한 사실은 선생이 지닌 스승의 학문에 대한 인시의 깊이와 친밀도를 드러내는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선생이 나중에 스승의 진지실득(眞知實得)의 학문적 태도를 본받으려고 한데서 스승이 선생에게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뒷날 선생이 지은 [퇴계선생사전]에서 퇴계선생의 교육에 대하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심나는 점을 질문하여 한층 상세히 가르쳐 주기를 청하면, 그 학식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가르쳐 주되, 반드시 입지(立志)에 먼저 힘 쓸 것을 전제로 하고, 주경(主敬). 궁리로써 공부할 것을 첫머리로 삼아, 간곡하게 타이르고 인도하여 도와서, 계발(啓發)된 후에야 그쳤다. 글을 볼 때 의심나고 어려운 것에 이르면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지 않고, 바드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널리 채택하여 비록 장구(章句)의 뜻에만 몰두하는 얕은 선비의 말일지라도, 유의하여 세밀히 듣고 허심으로 이해하며, 되풀이하면서 참고하여, 마침내 정도(正道)로 돌아간 뒤에 그쳤다. 변론할 때 기색을 온화하게 하고 말은 통달하며, 논리는 명백하고 문의(文義)는 정확하여, 마침내 깊고 현묘한 학설을 말하지 않았다" {학봉선생문집 속집} 권5. [퇴계선생사전])

뒷날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선생은 "퇴계선생이 역대 성현 심법의 지결(旨訣)을 손수 써서 학봉 김선생에게 주었으니, 그 함축된 뜻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였다. 또 {조선왕조실록} 선조 40년 정미 5월 을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선생의 학문적 풍도와 선생의 치세경세론인 척사광정의 시폐시무론을 앞세운 대의적 군자행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스승에게 도야된 실천의 학을 치인경세에서 그대로 드러낸 사례가 될 것이다.

"류성룡과 조목, 그리고 김성일은 함께 퇴도(退陶)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독실(剛毅篤實)하고 풍채와 범절(凡節)이 높고 엄정(嚴整)하였다. 바른말이 조정에서 수용되지는 아니했으나 대절(大節)이 탁락(卓落)하여 남이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 나라 일로 최선을 다하다가 군진에서 졸 하였다. 퇴도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으뜸으로 삼는다.

돌아와 여러 형제들과 선유정에서 독서하였다. 아버지 청계대조가 지은 선유정은 낙연 승경으로 묵좌징심(默坐澄心)하여 독서한 곳으로 이 선유정에서의 얻은 바가 많았으니, 중년까지 벼슬길 말미에도 틈을 내서 선유정을 찾았다. 정자 옆에 오래된 전나무가 있었는데 학봉선생이 손수 심었다고 한다.